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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CRAFT

  포스트 크래프트란?

  도예란 무엇인가? 도예의 예는 예술인가? 공예인가? 예술과 공예의 차이는 무엇이고 그 차이는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는가? 그리고 그 차이는 동시대 도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 만약 유효하다면 어떤 이유에서 유효한 것이고, 유효하지 않다면 어떤 이유에서 유효하지 않는가? 둘의 차이는 동일한 위치에서의 차이인가 다른 층위에서의 차별인가? 즉, 현대도예의 범주에는 예술과 공예가 공존하는가? 공존한다면 도자 매체의 특성에 의한 것인가? 동시대 환경의 잡종성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예술과 공예를 나눌 수 없이 중첩되어 있는 것인가? 동시대 도예란 무엇인가?

  동시대 도예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동시대 환경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고, 도예의 ‘예’가 공예인지 예술인지 그리고 그러한 분류가 의미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동시대 환경에 대한 정의는 기준마다 매우 다양하게 정의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단일서사가 아닌 다중서사에 의해서 서술되는 다원주의와 자본과 산업의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단일초점을 해체한 후기구조주의에서 기인하므로 구축과 탈구축에 관하여 살펴보고 이를 도예환경에 대입한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기에서 도예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와 방향성을 살펴본다.

  탈구축의 관점에서 도예의 ‘예’는 하나의 뜻만 의미하지 않는다. ‘예’의 의미공간에는 예술과 공예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예술과 공예의 불합리한 분화 과정을 살펴보고, 후기구조주의로 인해 해체된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예술과 공예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공예를 차등한 미학은 모더니즘에 기초하고, 그 모더니즘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기초한다. 후기구조주의의 관점을 통해서 형이상학적 존재가 어떻게 해체되는지 살펴보고, 도예의 ‘예’가 어떤 이유에서 해체되어야 하며, 그 방법론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도예의 ‘예’를 해체하는 방법론으로 ‘넓은 의미의 반공예’와 ‘좁은 의미의 반공예’를 제시한다.

  ‘넓은 의미의 반공예’는 타자화된 공예인 ‘모더니즘 공예’의 해체 방법론을 의미하며, 해체된 공예를 ‘포스트 모더니즘 공예’라 한다. ‘넓은 의미의 반공예’의 시작으로 모더니즘 공예의 해체를 시도했던 ‘하워드 코틀러’를, 해체의 전조단계로 추상표현주의 도예의 피터 볼커스와 펑크아트의 로버트 아네슨을 둔다. 메타언설을 해체하는 방법론으로는 재의미화와 재제작이 있다.

 

  재의미화는 고정화된 사물의 본질을 해체하는 의미로써 의미가 고정적이지 않고, 의미의 공간이 무한히 넓음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데리다의 차연과 대리보충의 개념과 맥을 같이하며 비언어화, 창조적 오독, 가변사용 등의 방법론이 있다. 비언어화는 지시하는 것과 지시된 것의 관계를 제거하여 지시와 언어화 된 것을 해체한다. 창조적 오독은 고정적 본질을 오독하여 본질의 공간을 우연적으로 확장시키는 사건을 말한다. 오해와 오독으로 인한 공간의 확장은 종종 다른 세계와의 만남에서 발생한다. 가변사용은 앞서 말한 수동적 우연이 아닌 능동적 자세이며, 사물의 본질을 부정하고 다른 서사를 개입시켜 의미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가변사용은 알레고리가 서사를이용하는 방식과 같다.

  재제작은 고정적 본질을 해체하는 방식이 아닌, 표현된 것을 다시 바꾸는 방법으로 본질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는 일반화된 사물을 다른 방식과 물질로 제작하여 고정적 본질에 대한 의문을 자극한다. 예로 PVC를 꼬아 만든 이광호의 스툴이나 풍선에 에폭시를 얹어 만든 양승진의 스툴이 있다. 방법론으로는 목적 구현 방식에서의 다양화를 시도하는 애드호키즘과 특정 구조 안에서 여러 요소를 조합하는 브리콜라주의 제작법을 수용해 표현의 다양화를 추구한다. 또한 재제작은 거대서사를 미시서사로 바꾸는 과정이므로 이에 리사이클, 리폼, 커스터마이징 등의 과정도 포함시킨다.

  좁은 의미의 반공예’는 ‘넓은 의미의 반공예’에 의해 해체된 ‘포스트 모더니즘 공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다시 해체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포스트 모던 환경에서의 사물은 고정적인 본질을 갖지 않는다. 본질을 허구로 지적하고 본질의 공간이 비어버린다면 그 곳은 허무만 남는다. 허무가 된 본질의 공간이 가상이 되면 지시된 것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본질을 부정 한다면 본질은 가능성을 잃고 이미지는 과잉이 된다. 과잉 이미지의 세상은 혼종성, 무근본, 파편화, 다원성 등의 개념을 바탕으로 스펙타클한 이미지만을 복제한다. 이것을 니꼴라부리요는 ‘포스트 프로덕션’의 유형으로 설명한다. 유형에는 기존 작품들을 재프로그램 하기, 역사화된 양식과 형식에 거주하기, 이미지 사용하기, 형식의 카탈로그서 사회를 사용하기, 패션과 미디어에 투자하기 등이 있다. 결국 포스트 모더니즘 공예의 방법론은 포스트 프로덕션의 유형과 다를 바없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방식으로는 본질의 허무를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잉된 이미지만 계속해서 복제되는 현상을 분석할 뿐이다. 이미지의 범람은 주체적인 개인의 세계 내로 침범하여 그 곳을 가상의 세계로 만든다.

  이미지의 범람을 야기한 본질의 허무를 반대하고 가능성의 공간으로 재인식하게 하는 방법론이 바로 ‘좁은 의미의 반공예’이다. 탈구축의 방식은 본질을 반대하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지만, 그로 인해 사라진 본질이 허구가 된다면 실존을 마주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반공예’는 사물의 본질을 부정하여 공간을 확장하지 않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본질로 공간을 확장시킨다. 결국 반공예는 사물을 현존(existential)으로서 가능적 본질의 현실화임을 인식하는 태도이며, 이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발생한다는 ‘일체유심조’의 태도다. 원효의 해골물은 사물 자체에는 정도 부정도 없으며 오직 마음에 달려있음을 알리는 사물이자, 가능성으로서의 본질을 인식하게 한 매개체다. 본인은 이 태도를 공예에 접목시키고자 ‘전통적 공예’에서 ‘넓은 의미의 반공예’로 그리고 ‘좁은 의미의 반공예’로 넘어가는 과정을 청원유신 선사의 ‘산시산,수시수(山是山 水是水)’에 대입한다.

  청원 선사의 ‘산시산,수시수 산이고 물은 물이다’ 선화를 먼저 보도록 하겠다.

 

  1단계 老僧三十年前 未參禪時 / 見山是山 見水是水 내가 30년 전 참선 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2단계 乃至後來親見知識 有入處 /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그런데 후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깨우침에 들고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3단계 而今得箇休歇處 / 依前見山祇是山 見水祇是水 그러다 이제 정말 깨우침을 이루고 보니 전과 같이 산은 그대로 산이었고 물은 그대로 물이었다. / 大衆這三般見解是同是別 / 有人緇素得出 許與親見老僧 대중들이여! 이 세가지 견해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이를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하겠다.

 

  이제 이를 공예에 대입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다. 1단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는 단일초점으로 조망하는 공예이자 ‘반공예 이전의 공예’이다. 거대서사의 제작 아래의 공예이며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의 공예와 같다. 이 때의 공예는 사물을 제작할 때 고정적 본질에 의거하여 사물을 제작하였고, 이를 잘 보여주는 태도가 장인정신이다. 2단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이는 다초점으로 조망하는 공예이자 ‘넓은 의미의 반공예’이다. 미시서사의 제작 아래의 공예이며 포스트 모더니즘 공예이다. 이 때의 공예는 사물을 제작할 때 더 이상 고정적 본질에 의거하여 사물을 제작하지 않고, 이미지를 다양하게 편집하여 스펙타클을 양산한다. 3단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초점해체로 조망하지 않음으로 조망하는 단계이다. 이 때의 공예는 제작의 범주에서 벗어 날 수 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 공예 이후의 공예이다. 이를 ‘좁은 의미의 반공예’라하고 공예 이후의 공예라는 의미로 ‘포스트 크래프트’라 한다. 이 단계의 공예는 사물의 가능적 본질을 마주하는 태도이자 비제작적 선택이다. 인류 최초의 도구인 뼈다귀와 원효의 해골은 현존의 가능적 본질을 그저 마주한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현존의 가능적 본질을 공예로 풀이할 수 있고, 공예의 제작은 현존을 만드는 과정이 된다. 결국 포스트 크래프트란 과잉 이미지의 스펙타클 사회에서 본인의 세계 내의 진실한 존재를 마주하게 하는 방법론이다.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지 않고 안과 밖이 공존하는 ‘물아일체’가 되며, 도예의 예를 예술과 공예로 나누지 않고 현존과 가능적 본질로 이해할 수 있을 때 4차 산업혁명의 스펙타클 사회에서 공예는 허명이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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