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ASYAAF

빛 좋은 개살구

 

 피에로 만초니의 똥, 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 조셉 코수스의 의자,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 사물을 벗어난 동시대 미술은 난해하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말하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죽은 저자의 텍스트를 궁금해한다. 미술체계가 미술보다 위에 있어서인지 우리는 배운대로 보고 배운대로 해석한다. 학교에서 시인의 텍스트를 기호로 표시해가며 해석하던 방식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던 나는 이제 감상에 앞서 작품의 의도부터 찾아본다. 작품, 사조, 테마, 기법 등의 정보들로 작품을 이해하고 이해가 되었을 때 사진을 찍거나 인스타에 업로드를 한다. 그리고는 잘 찾아보지 않는다. 내 핸드폰에 저장된 이미지와 텍스트들은 별 쓸모없이 용량만 차지하고 있다.

 

 공예라고 상황이 다를까.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공예적으로 만들어진 사물을 우리는 이미지와 텍스트로 소비한다. 사물인식과 주체성은 이미지와 텍스트 뿐인 공예에는 없다. 그렇다면 공예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물은 무엇일까. 사물을 어떻게 인식해야하고 주체적인 공예란 무엇일까. 공예란 무엇일까. 도예학부를 졸업한 내게 공예에 대한 정의는 어려웠다. 그래서 내 작업의 출발은 공예에 관한 것이 되었다. 졸전을 앞둔 나는 목적을 위한 기예인 공예를 사용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사물을 만드는 공예를 거부하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통념의 공예에서 느껴지는 고리타분함. 그게 싫었다. 그래서 그것을 자극하고 싶었다. 그렇게 달항아리에 문신을 그려넣고는 반공예라 이름 지었다. 그 때의 반(反)이 향하는 곳은 고리타분한 공예의 장소였다.

 

 고려청자나 달항아리에 그려넣은 문신은 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의도를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물어본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도 없었다. 이유와 근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고리타분한 그런것들이 싫어서 했던 작업이었으니까. 그러한 태도는 밀레니얼 그 자체였다. 의미가 없어도 상관없는 무민세대 'Meaningless’의 태도. 하지만 이유없는 작업은 오래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유 없이 시작했다면 그만두는 것또한 이유 없을 테니까. 그래서 빛 좋은 개살구에 의미를 찾고자 했다.

 

 지금 이 적은 양의 포트폴리오에 실린 작품들과 글들은 공예에 대한 궁금증과 실험 그리고 생각들이 담겨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난해한 예술처럼 난해한 공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똥과 토끼 그리고 의자와 바나나는 보는 이에게 첫 걸음을 어렵게 할 뿐이지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나의 작업과 생각들이 누군가에게 공예란 무엇이고 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을 유발시켰으면 한다. 내가 만든 사물들이 누군가에게는 쓸모 없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는 것일 것이다. 공예는 쓰임에서 벗어난다. 공예는 물질을 다루는 숙련도이자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은 시대를 초월하지 않으며 그 시대 속에서 이해되고 사용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짧은 포트폴리오에 적힌 내용들이, 그리고 그러한 작품과 사물들이 그 사람의 시공간 속에서 각자만의 주체적인 생각으로 해석되고 사용되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공예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물질과 숙련도 그리고 과정에서 탄생된 사물과 그것을 맞이한 주체자와의 연결, 그것은 그 사람의 세계 속 사물이자 자신만의 어떤 것이면서 모든 것일 것이다.

 

 

 

안티 크래프트에서 포스트 크래프트로

 

 반공예는 앞서 말하였듯 고리타분한 통념의 공예를 반대하고자 했던 객기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의 반공예는 순수미술의 탄생을 위해 타자화, 주변화된 모더니즘 공예를 반대함을 뜻한다. 서유럽 근대의 산물인 공예의 개념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자원을 다루어 일구어 내는 물질 문화의 영역일반과는 다르다. 지금의 공예는 근대기에 성립된 역사적 공예이다. 그렇기에 반공예는 타자화와 주변화의 부당함 그리고 그것을 성찰없이 받아들인 공예에 대한 지적에 관한 것이다.

 

 기예였던 공예는 근대에 이르러 순수예술 개념과 대응되는 실용적인 예술로서 목적이 있는 기예이자 노동기예로 분류되었다. 실용과 기예의 공예에는 순수성을 박탈당했다. 바뙤(Batteux)는 예술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면서 여러 기술(art)들 즉, 기계적 예술(mechanical)과 자유로운 기술(liberal arts)에서 기계적인 기술과 아름다운 기술 = 예술로 재편성했다. 그리고 바움가르텐(Baumgarten)은 고전적인 ‘기술=예술’을 부정하면서 미학이라는 이름을 학명을 내놓았다. 비로소 근대적인 예술관이 성립되었다. 또한 칸트에 이르러 순수예술의 지위는 철학적 체계 속에서 개념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때 칸트는 자유와 쾌를 위한 순수예술과 미적 즐거움 그리고 이윤과 목적을 위한 공예와 단순한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구별한다. 헤겔은 예술철학에서 예술작품을 정신적인 것으로 묘사하며 정신을 위한 것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술의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 공예를 타자화, 주변화 시키는 과정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헤겔에게는 공예는 단순히 수단이자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갖고 있는 사물이자 활동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콜링우드에 이르러 극대화 된다. 그는 예술 대 공예의 양극화를 자신의 미학적 모티브로 끌어들임으로써 이항대립화 시킨다. 이렇듯 서유럽 근대의 산물인 공예는 순수예술을 정의해내는 부정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만 가질 뿐이다.

 

 추상표현주의 도예의 피터 볼커스와 펑크 아트의 로버트 아네슨은 부정의 대상으로서의 공예를 거부하고 흙이 지니는 표현성을 극대화 함으로써 도조의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흙은 다양한 표현을 위한 수단이 되었고 흙을 통한 예술적 표현은 많은 도예가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흙의 속성과 에너지를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그 결과 도예의 공예성은 많은 부분 상실되었다. 오늘날의 많은 도예 작품에는 물질을 제어하고 사물을 만드는 과정은 표현의 수단으로 취급하여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자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타자화되고 주변화 된 공예는 예술의 빛을 얻고자 스스로 개살구가 되었다. 사물인식과 주체성이 상실된 공예에는 과잉된 스펙터클 이미지의 허무만 남을 뿐이다. 모더니즘 공예의 타자화를 해체하는 것이 아닌 사물의 형태를 해체하는 실험들은 공예 작품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본질의 공간은 가능성의 공간이 아닌 허무의 공간으로 자리잡혔다. 그래서인가 지금의 공예는 현존재와 사물의 만남에 대한 어떠한 물음이 없고 이미지와 스펙터클만 가득하다. 용량을 가득채운 텍스트와 이미지는 다양하게 변모하며 본질의 공간을 더욱더 허무하게 만들고 있다.

 

 반공예는 타자화, 주변화 된 공예를 미학적 차등을 지적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는 이미 힘을 잃었다. 목적과 용도로 인한 타락성으로 공예의 차별을 만든 미학은 더 이상 동시대를 대변하지 못한다. 단토의 예술철학은 공예의 차등화를 벗어난다. 그렇기에 반공예는 그러한 것들을 근거로 형이상학적 허구에 의한 차별을 지양하며 주체인식으로서의 공예에 대한 주목을 하고자 한다. 공예는 사물 제작에 관한 물질 제어와 숙련도 그리고 과정이자 사물인식에 관한 것이다. 사물은 현존재와의 관계에서 현존재 세계 내로 침투하며 서로 상호연결된다. 이 연결은 현존재의 주체성으로 긴밀하게 이어지며 그것은 그 사람만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그것을 개성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반공예에서의 공예는 리사이클, 리폼, 커스터마이징 등의 과정 또한 공예라 보며, 전통적인 물질을 벗어나 레진, 정밀세라믹, 플라스틱 등의 다양한 재료를 중요시한다. 목적 구현의 방식에서 다양화를 시도하는 애드호키즘과 브리콜라주, 재제작과 재의미화 등은 본인 세계 내의 사물과의 긴밀한 연결을 도와주는 다양한 실험이자 태도이다. 반공예는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통적 공예 사물의 형상을 무분별하게 해체하고 실험하는 결과로 잉태된 과잉 스텍터클 현상을 지적하며 사물의 다변화는 본질의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말한다. 이것은 원효의 해골이자 인류 최초의 도구의 가능성과 맥을 같이한다. 쉽게말해 공예란 사물과의 현존재와의 연결이자 그것을 구현해내는 스스로의 성찰 과정인 것이다. 만약 공예가 개개인의 주체성을 이어주는 사물을 만드는 과정이 되고 그것을 위한 숙련도를 통해 스스로가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영역이 일반화된 시기가 온다면 그것은 지금의 공예 이후의 공예가 될 것이다.